방화주의 리얼리즘

방화주의 리얼리즘에 관하여

파시즘의 귀환과 신반동주의는 언제나 어떤 미래가 이미 도착했다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시간은 더 이상 중립적 배경이 아니다. 알고리즘으로 가속된 지구적 생산·소비 사슬 속에서 권력은 흐름을 선점해 미래-가격을 고정한다. 방화주의(Pyro-politics)는 이 선점된 시간을 태워 버리는 전략이다. 화염은 과열된 현재를 불완전 연소 상태로 되돌려, 새로운 사건이 삽입될 간극을 만든다. 이때 정치적 주체는 흩어진 잔불 속에서 태어나는 불안정한 시간을 조직하며, “정치적 상상력”을 공간이 아닌 시계열 안에서 되찾는다. 방화는 파괴가 아니라, 타버린 잔해가 재편성될 여백을 확보하는 초학제적 조경술이다. 

세계가 끝났다는 비관은 오히려 새로운 인식의 파이프라인을 여는 승인 절차이다. 불안은 주체를 해체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규모, 예컨대 세포, 도시, 행성 등을 가로지르는 공명이 된다. 고딕적 페시미즘은 종말이 아니라 강도를 재분배하는 미시 정치이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며, 미래 또한 펼쳐진 모서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는다. 과거는 종종 접혀 현재의 뒤쪽에 들러붙고, 미래는 종이비행기처럼 구겨져 눈앞으로 내던져진다. 이 접힘과 구김은 기억, 예측, 시뮬레이션이 뒤엉킨 비선형 인지 지도의 실재적 작동 방식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정답을 회고함’도, ‘완료된 유토피아를 예단함’도 아닌 접힘과 구김의 (무)질서를 편집하는 작업이 된다.

방화주의는 정부나 제도를 지운다는 급진적 저항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매끄러워진 관리 알고리즘의 표면에 조그만 그을음을 남겨, 프로세스에 뒤틀림을 야기한다. 초정상화(supernormalize)! 불씨는 예측 모델의 시계열을 흐트러뜨리고, 인간-기계 협력 고리를 한시적 오작동으로 밀어 넣는다. 그 짧은 오류 구간에서 새로운 정치적 행위 주체가 출현할 여지가 생긴다. 방화주의는 의도된 버그 작성술이다. 완전히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연소를 관리하며, 시간의 누락분을 점유한다. 소비되는 미래를 지연시키고, 그 공백 속에서 아직 이름 없는 사건을 가동하기.

이 현장은 미술이라는 고립된 해석에 갇히지 않고 전시장 바깥의 모든 것과 함께 연속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방화는 더 큰 전지구적 화재라는 연속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각 작업들은 완결된 내용을 가진 변증법적 체계가 아니라, 유기체와 무기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세계의 국지적 진술에 불과하다. 이론과 예술은 더 이상 단선적 논증의 형식이 아니다. 여기서는 정통적 논증과 반박의 절차가 의미를 잃고, 용융된 담론들이 흐르면서 서로의 벽을 침식한다.